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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오랜만에 행아웃 (but 광교 again), 캔디맨, 쇼핑

일기



에휴...닝카이 사진편집하기 귀찮다
완전 오랜만에 외출했다 로케는 또 광교였지만 내 동네에 쳐박혀 있느니... 서울가기도 귀찮음
롯데시네마에서 캔디맨을 봤다 조던필 제작으로 홍보를 하고 있지만 어쨌든 조던필이 감독한 것은 아니고
그가 항상 그렇듯 정치적 메세지가 강했는데
정통적인 공포영화의 서사와 발화법을 따르는 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반면 정통적이어야만 했던 영화긴 함. 때문에 공포를 기대하고 보는 거라면 비추다. 인종차별역사와 엮인 정치적 메세지를 이번에는 공포영화와 함께 또 어떻게 풀어냈을까 이런 게 궁금하다면 추천. 나는 공포, 고어 이런 거에는 정말 면역력이 높아서... 벌집피부? 이런 거는 eww 하면서 봤는데 피칠갑이라거나 피부가 뜯긴다거나 이런 건 뇌에서 나도 모르게 잼민이처럼 '아 이런 거 다 분장인데 ㅋㅋ' 이래버리기 때문에 그냥 맹눈으로 본다. 바라건데 피칠갑과 고어가 없는 멋진 공포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건 공포스럽지가 않다고 더이상... 그냥 피가 나오고 몸이 갈기갈기 찢길 뿐이지 공포와는 무관하단 말이다. 맞아. 내기준 진정한 공포는 그래비티 이런 거임... 진짜 무서워
생각해보니 캔디맨이라는 존재는 처녀귀신과 흡사하잖아? 사회에서 약자로 억압받다가 억울하게 죽음. 한이 서림. 사념체로서 '흑인 살인마 귀신' 의 탄생, 공포의 대상이 되다. 아니 사실 괴담에 등장하는 귀신이라는 존재들은 거의 다 약자, 소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썰인데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캔디맨이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보통 미국땅에서의 흑인인권의 역사를 다룬다면 1.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를 굉장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으로 풀어내려 했고 2. 천부인권이니 자본주의니 제국주의니 하는 거대한 것을 저격하며 설득하려 함과 동시에 3. 흑인들이 생존해 온 부조리와 회한과 thug life를 hood 로 집결할 수 있는 공감대로 사용하는 미디어가 많았는데 겟아웃이나 어스도 완전히 다른 측면으로 흑인인권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캔디맨은 저걸 굉장히 비논리적 비이성적 미신적으로, 분노와 폭력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새로웠거든. 그런데 맞다, 이제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구미로 흘러들어가게 되었으며 어떤 삶을 살다 해방되었는지, 해방된 후에도 어떤 갖가지 꼬롬한 술책으로 견제당했는지 대에충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표출적인 접근이 나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은 호소하고 설득한다는 것이고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는 거다. 더이상 더 큰 이익을 위해, 지배층의 동의와 동정과 공감을 한 표 더 얻기 위해 당장을 참거나 친절히 설명해주거나 애써 차분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하여튼 처녀귀신을 생각해보니 캔디맨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말한 건 결국 처녀귀신 설화랄까 이 개념이 탄생한 것은 '처녀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데 캔디맨은 그 반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처녀귀신이 두려운 이유? 처녀가 살아있을 적에 처녀한테 좆같이 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고나서 귀신돼서 한맺혀서 나한테 해꼬지할까봐 겁이 나는 거지. 그런 정신쇠약에 시달리던 인간들이 헛것을 보다가 처녀귀신 이야기를 줄줄이 만들어내고 그게 사회문화적인 아이콘 중 하나가 된 거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캔디맨은 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내고 이어져가는 존재다. 물론 처음에는 억울하게 흑인에게 캔디맨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탄생했지만 그를 부활시킨 자, 잊지 않은 자들은 흑인이다.
이제는 PC 눈치를 봐서 흑인한테는 그런 짓을 못하지만 옛날에는 한창 흑인, 라티노들이 영화에서 악역으로 나와서 선한 백인들을 죽였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선한 백인을 죽이게끔' 만들어놓고 또 그것을 보고 '역시 흑인은 폭력적이다, 이기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악순환에 캔디맨은 친절하게 백인들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 지점 때문에 영화가 유치해지기도 하면서, 유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속에서 죽는 백인들은 모두 흑인을 괴롭히고, 깔보고, 이용해먹고, 가스라이팅하고, 과잉진압한다. 저지랄을 하니깐 죽지ㅉㅉ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과 비관적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영화가 상당히 컬트적으로 헤리티지를 안고 간다. 남주 여주 둘 다 그들이 캔디맨이 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랄까 핏줄대대로 가족서사로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번듯하게 살게 되어도 그들의 핏줄에 흑인의 역사가 박혀있다. 특히 여주는 굉장히 모순적인 캐릭터인데 아버지가 그림그렸던 일을 굉장히 싫어하면서도 자신은 미술을 사랑하여 유능한 큐레이터로 산다. 또 그리 유능한 큐레이터로 살면서도 더 유능한 백인 콜렉터들의 연줄을 잡기 위해 아둥바둥하며, 자기 스스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운은 떼 봤으나 백인들에게 아주 깔끔하게 묵살 당한다. '이제는 흑인들도 사회 윗선에 많이 진출했어요' 하는데 정말 교묘하게도 그렇지 않다. 모순은 여전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왜 캔디맨은 거울에서 나타날까? 생각해봤는데 아마 위에 처녀귀신 이야기처럼 죄책감으로서 또 그로 기인한 공포로서 캔디맨은 백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거울, 즉 나, 내 마음을 봐야지만이 캔디맨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죄책감은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다. 흑인들도 마찬가지. 아무리 나는 잘 살고 있다, 나의 능력으로 정당하게 인정받았다는 기분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결국 마음속 어딘가에는 자신이 흑인이며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억압받고 눈치봐야 했던 것을 알고 있는 거다. 분노가 자리하고 있는 거다. 벽이 있다는 걸 아는 거다. 카니예웨스트를 봐라. 자신이 개씹잘나가는 아티스트임과 동시에 흑인이라는 절대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속성(?)에 결국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 , ,

아 오랜만에 쇼핑을 했다 완전 운명같은 옷을 만나서 한 번 입어보고 바로 질렀다 수선이 좀 필요하긴 한데 얼른 해가지구 닳아해질때까지 입을 거다 ㅋㅋ